# 빈자리와 리모컨

남자는 자신이 죽을 때 울어줄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거라던데. 그 한 사람이 먼저 떠나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지...,


🌸 리모컨과의 숨바꼭질

어라, 이놈이 또 어디로 숨었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거실 소파 위를 더듬었다. 없다. 식탁 위도, TV 앞도 텅 비어 있다. 리모컨 그 녀석은 매일 아침 나와 숨바꼭질을 하자고 덤빈다. 꼭 소파 틈새로 출근 도장을 찍는 성격이다. "영감님, 오늘도 나 없으면 뉴스 한 편도 못 보면서 짜증은." 리모콘이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 같다.

허리를 굽혀 소파 밑을 들여다보니 깊숙한 구석에 효자손과 나란히 누워 있는 리모컨. 기가 막힌다. 이 집 가구들은 밤새 저희끼리 반상회라도 여는 모양이다.

간신히 TV를 켜고 주방으로 걸어가는데 발끝에 툭 걸리는 게 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 찌개 데울 때 불 조심해. 깜빡 좀 하지 말고."

칼칼하면서도 속 깊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집안엔 나 혼자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뒷산 자락의 매미 소리만 극성맞게 넘어올 뿐이다. 그 사람이 가고 벌써 두 번째 여름이다.

🍵 마당의 빈 의자

서울 외곽으로 이사 오자고 고집을 부린 건 나였다. 흙바닥 밟고 살고 싶다는 내 말에,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짐을 싸서 따라와 주었다.

며칠 전에는 마당 풀을 뽑다가 이웃집 박씨를 만났다. 마침 박씨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집사람이였다 '날도 더운데 얼른 들어와 점심 먹으라'는 성화였다.

박씨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아이고, 저 할망구 잔소리는 알아줘야 해. 그래도 마누라가 눈앞에 안 보이면 눈앞이 캄캄해."

박씨는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냥 흙 묻은 호미만 만지작거렸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곁에 있을 때가 좋은 거지, 먼저 가버리면 남은 사람은 그냥 껍데기처럼 떠도는 거야.'

속으로만 그렇게 웅얼거렸다.

집에 돌아와 씻으려고 세탁기를 돌렸다. 다 돌아간 세탁기 문을 열었더니, 예전에 그 사람이 신던 화사한 꽃무늬 덧버선 한 짝이 홀로 덩그러니 바닥에 붙어 있다. 서랍 깊은 곳에 다 정리해 둔 줄 알았는데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온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다른 쪽 짝이 없다. 이 녀석도 주인 닮아서 짝을 잃고 헤매는 모양이다. "네 짝은 어디 가고 너만 남았냐." 양말을 털어 널며 중얼거리는데, 이상하게 앞마당 빨래 건조대가 뽀얗게 흐려졌다.


🌼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리움

혼자 사는 티를 안 내려고 일부러 읍내 시장통을 한 바퀴 돌았다. 반찬가게 할머니가 "사장님, 오늘 왜 이리 기운이 없어? 겉절이 새로 했으니 좀 가져가. 사모님이 우리집 겉절이 좋아했잖아." 하며 검은 봉지를 내민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버스 정류장 앞 언뜻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긴 파마머리에 베이지 티셔츠. 그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여보!" 소리를 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하늘을 보았다. 지나가던 동네 개 한 마리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뭘 봐, 인마." 하고 툭 던지는데,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그 사람은 참 눈물이 많았다. 딸내미 시집보낼 때도 식장 구석에서 손수건이 젖도록 울었고, 내가 사업하다 주저앉았을 때도 내 손을 잡고 남몰래 훔치던 눈물이 한 바가지였다. 마지막 병실에서 야위어가는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당신 혼자 두고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며 아이처럼 서럽게 울던 사람이다.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 그 소중한 사람을 먼저 보낸 이 자리가 왜 이렇게 시리고 아픈지 모르겠다.

혼자 남겨진 이 넓은 거실에서 리모컨과 숨바꼭질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쓸쓸한 노릇이다. 안방 장롱을 열자 그 사람이 생전에 쓰던 은은한 화장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눈앞이 흐려져 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뿌옇다.

🍀 작가의 한마디

사람이 살면서 내 편 하나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꼭 그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 온기를 알아채고는 하지요. 지금 곁에서 들리는 그 귀찮은 잔소리가,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의 자장가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는 쑥스러워도 슬쩍 손 한 번 잡아주세요. "당신이 있어서 참 좋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요. 곁에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고마워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윤슬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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