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칠판지우개 먼지와 석회 바닥
1984년의 봄은 둔탁한 소리와 뿌연 먼지 속에서 찾아왔다. 3학년 복도 바닥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아닌, 하얗게 때가 탄 딱딱한 석회 시멘트 바닥이었다. 매일 청소 시간이면 아이들이 자루걸레를 대충 문지르며 지나갔고, 쉬는 시간마다 수백 쌍의 실내화가 바닥을 긁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거친 남학생들의 고함과 흙먼지가 주를 이루는 학교였지만, 3층 중앙 계단을 지나 6반과 7반이 있는 구역으로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공기의 결이 달라지곤 했다.
그 시절 우리 학교는 조금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급이 텁텁한 땀 냄새가 배어 있는 남학생 전용 반이었지만, 6반과 7반만큼은 남녀 합반이었다. 그리고 그 복도 맨 끝, 햇빛이 가장 길게 드는 곳에 위치한 9반은 오직 여학생들만 모여 있는 반이었다.
고3이라는 무거운 명찰을 달고 매일 아침 입시라는 아득한 벽과 맞서야 했던 시절, 6반과 7반 주변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숨구멍 같은 장소였다. 괜히 매점에 다녀오겠다며 까치발을 들고 6반 앞을 지나는 남학생들이 수두룩했고, 쉬는 시간마다 9반 앞 정수기 근처는 물을 마시려는 건지, 누군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건지 알 수 없는 남학생들로 늘 북적였다.
나 역시 그 남학생들 중 하나였다. 내 반은 3반, 순수한 남학생반이었다. 4교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주번이라는 핑계를 대고 교실 뒤편에서 나무 자루가 달린 칠판지우개 두 개를 쥐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창틀에 칠판지우개를 대고 '팍! 팍!' 소리가 나도록 힘껏 털어냈다. 뿌연 분필 가루가 하얗게 흩날리며 오후의 햇살 속에서 반짝거렸다. 지우개를 무심하게 털어내면서도 내 시선은 늘 저 멀리 6반 창가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은희’가 있었다.
2. 6반 창가의 은희
은희는 6반 창가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합반이었던 6반은 창가 쪽에 여학생들이, 복도 쪽에 남학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은희의 단발머리는 늘 오후 두 시의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빛을 띠곤 했다.
은희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들고 가요톱10에 나온 노래 이야기를 하느라 시끄러웠지만, 은희는 늘 하얀 카라깃을 정돈하며 작은 단어장을 넘기거나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복도 창틀에서 칠판지우개를 팍팍 털어내며 하얀 먼지를 날릴 때, 가끔 은희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은희의 시선이 공중에서 터져 나가는 분필 가루 너머 내 손 끝이나 어깨에 머물렀다가 거두어졌다. 단 한 번도 눈이 똑바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짧은 시선의 궤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은 감히 다가가 말을 건네거나 손을 잡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기를 마시고, 그 아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야, 먼지 다 들어온다! 적당히 털어라!"
뒤에서 7반 남학생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나는 놀란 마음을 숨기려 괜히 흠칫하며 지우개를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손가락에 하얗게 묻어난 분필 가루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은희의 이름을 세 번 되뇌었다. 은희, 은희, 은희.
3. 노을빛 자율학습과 9반의 비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고3의 일상은 더욱 팍팍해졌다.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이 이어졌고, 교실 안은 늘 땀과 졸음, 그리고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 저녁 다섯 시 반,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가 축구를 하거나 매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저녁을 일찍 먹고 홀로 3층 복도로 올라오곤 했다. 노을이 주황빛으로 온 학교를 물들이는 그 시간이야말로 복도가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6반과 7반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석회 바닥을 따라 불어왔다. 남학생들의 거친 함성이 저 멀리 운동장에서 아득하게 들려올 때, 복도 끝 9반 쪽에서는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나 여학생들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9반은 남학생들에게 금단의 구역이자 여신들의 신전 같은 곳이었다. 오직 여학생들만 있는 그 교실 앞을 지날 때면, 제일 당당하던 아이들도 괜히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발걸음 소리를 줄였다. 9반 문틈으로 퍼지는 분꽃 향 같은 향수 냄새와 섬유유연제 향기는 땀 냄새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생경하면서도 아늑한 그리움을 안겨주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6반 앞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서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 너머로 해가 떨어지며 하늘이 붉고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그때, 6반 뒷문이 스르륵 열렸다.
은희였다.
은희는 분홍색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마 어디가 아파서 야간자율학습을 면제받고 조퇴하는 모양이었다. 복도에는 오직 나와 은희, 단 둘뿐이었다. 1984년의 그 길고 길었던 여름날 중에서 가장 정적에 싸인 순간이었다.
은희가 복도를 걸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딱딱한 석회 바닥 위로 은희의 하얀 실내화가 슥슥 소리를 냈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어 창밖만 고개 돌려 바라보는 척했다. 손끝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려왔다.
은희가 내 옆을 지나쳐 가던 그 몇 초의 시간. 은희의 옷자락에서 은은한 비누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코끝에 닿았다. 그리고 은희가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안녕."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은희는 이미 계단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를 향한 인사였는지, 아니면 노을이 예쁜 저녁 하늘을 향한 인사였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은희의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안녕..."
은희가 떠나고 한참 뒤에야, 나는 아무도 없는 빈 복도에 겨우 나지막하게 답을 건넸다.
그날 이후 내 책상 서랍 안에는 작은 비밀이 하나 생겼다. 문방구에서 거금 500원을 주고 산 예쁜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와, 당시유행하던 노래가 담긴 녹음 테이프였다.
밤늦게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편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6반 창가에 앉은 은희에게. 오늘 노을이 참 예쁘더라. 너는 조퇴하고 집에 잘 들어갔니?’
첫 문장을 적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편지는 끝내 봉투에 담겨 은희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1984년의 고3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한편으로 너무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내 마음을 내보였다가 은희의 공부를 방해하게 된다면, 혹은 은희가 나를 부담스러워해 그 고운 시선마저 거두어버린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대신 나는 그 편지지를 접어 교과서 맨 뒷장, 제일 깊숙한 곳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은희가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올 때마다 공테이프에 녹음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내 마음을 달랬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6반과 7반, 그리고 9반이 있는 복도는 점점 더 고요해졌다. 학력고사가 다가올수록 아이들의 눈빛은 예민해졌고, 쉬는 시간의 소란스러움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느덧 창밖의 계절이 바뀌고 찬 바람이 석회 바닥을 스쳐 지나갈 즈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전쟁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은희 역시 창가 자리에 앉아 모의고사 문제집을 넘기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 역시 3반 교실에 갇혀 밤늦도록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힘겨운 계산과 암기 속에서도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나는 6반 복도의 그 비누 냄새와, 노을빛 속에서 들려왔던 "안녕"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품어 안은 자그마한 핫팩처럼,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따스하고 아늑하게 덥혀주곤 했다.
5. 마지막 학력고사, 그리고 이별
11월, 학력고사가 끝난 날의 풍경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학교는 순식간에 해방감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혼란에 빠졌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교과서를 창밖으로 던지기도 했고, 어떤 아이들은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교실을 정리하고 가방을 싸서 나오던 길, 나는 홀린 듯이 다시 3층 복도로 올라갔다.
6반과 7반의 문은 넓게 열려 있었고, 항상 가득 차 있던 책상들이 비어 있어 교실이 유난히 넓고 쓸쓸해 보였다. 복도 끝 9반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친 시멘트 바닥 위에는 던져진 종이 조각들과 하얀 분필 가루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은희의 자리가 있던 6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빈 책상 위에는 오후의 옅은 햇살이 외롭게 머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은희가 앉았던 그 나무 의자에 손을 올려보았다. 서늘한 나무의 촉감이 손끝에 닿았다.
그때, 뒷문 쪽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은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은희는 텅 빈 교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의자에 손을 얹고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니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단 한 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던 서로의 눈동자가 마침내 공중에서 정면으로 만났다.
은희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그동안 칠판지우개를 털며 하얀 먼지를 날리던 시간들, 복도에서 어색하게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 그리고 말을 건네지 못했던 서로의 수줍음이 모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은희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천천히 돌아서서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9반을 지나,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은희의 발소리가 1984년의 마지막 석회 바닥 울림으로 아득하게 퍼져나갔다.
나는 은희가 떠난 빈 복도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잡지 못한 손, 전하지 못한 편지, 한 번도 함께 걸어보지 못한 길들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았다. 오직 눈이 부시도록 아늑하고 따뜻한 온기만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 후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1984년의 그 낡은 학교 건물은 이미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매끈한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6반과 7반의 남녀 합반도, 비밀스러웠던 9반 여학생들의 복도도 이제는 오직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틀란티스 같은 풍경이 되었다.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정교하고 어른스러운 사랑을 경험했지만, 1984년 고3 시절의 그 첫사랑만큼 내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기억은 없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고, 고작 "안녕"이라는 두 마디가 전부였던 관계.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나 집착이 섞이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서정한 형태의 마음이었다.
가끔 유난히 노을이 주황빛으로 짙게 물드는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문득 분필 가루가 뿌옇게 날리던 그 시절의 복도로 돌아가곤 한다.
6반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복도 끝 9반 앞에서 풍겨 오던 은은한 향기, 그리고 창가에서 하얀 카라깃을 정돈하던 한 소녀의 단발머리.
그 아늑했던 시절, 그 따스했던 복도가 있었기에 나는 무거웠던 청춘의 한 시절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그립기에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는 1984년의 나의 첫사랑, 나의 6반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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