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태풍은 비보다 사람을 먼저 데려온다
우리 동네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게 문을 여는 해괴한 국밥집이 하나 있었다.
보통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상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셔터를 내리고 천막 줄을 조이는 것이다. 그런데 번영로 골목 제일 구석진 곳, 간판 글씨마저 다 벗겨져 'ㄹ' 자만 겨우 걸려 있던 <늘봄국밥>의 영옥 할머니는 반대로 행동했다. 라디오에서 "이번 태풍은 강한 중형급으로, 밤사이 우리 지역을 관통할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마솥 아래 장작을 빼고 가스불을 내리치듯 켰다.
"아이고, 할매! 남들은 다 문 닫고 집으로 도망가는데, 왜 지금 불을 붙여! 미쳤어, 미쳤어!"
옆집 세탁소 만식 아저씨가 비닐천막을 다그쳐 묶다가 소리를 질러도, 영옥 할머니는 못 들은 척 뚝배기에 토렴질만 탕, 탕 해댔다.
"바람이 심해지면 사람이 배가 고픈 법이여."
할머니는 늘 그렇게만 말했다. 그것이 그 해괴한 국밥집의 첫 번째 비밀이었다.
1막 |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태풍이 온다"아따, 오메! 날아간다! 내 대머리 날아간다!"
골목 어귀에서 비명이 터지면 틀림없이 태풍이 읍내에 들어선 것이다. 미용실 파마용 비닐캡을 뒤집어쓴 삼거리 댁이 치마폭을 움켜쥐고 국밥집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세탁소 만식 아저씨, 약국 김 약사, 그리고 경로당 회장님까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줄줄이 들어섰다.
비바람에 젖은 옷가지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와 뜨끈한 돼지 사골 국물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놈의 동네는 태풍만 왔다 하면 피난처가 국밥집이여, 국밥집."
김 약사가 젖은 안경을 옷자락으로 닦으며 털썩 앉았다.
"김 약사, 징징대지 말고 정종이나 한 잔 데워 달라고 해. 내 오늘 태풍한테 뺨 맞아가지고 귀가 다 멍멍하당게."
경로당 회장님이 젓가락으로 뚝배기를 딱딱 치며 소리를 쳤다. 그러자 주방 안쪽에서 영옥 할머니의 맵찬 목소리가 날아왔다.
"젓가락으로 뚝배기 치지 마! 복 다 달아나! 이 비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걸어 들어왔으면 얌전히 국밥이나 처먹을 것이지, 나이가 칠십이 넘어서도 떼쓰는 건 똑같구먼!"
"아 할매! 손님한테 처먹으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싫으면 나가든가! 문밖에 바람 세니까 5분만 서 있으면 저절로 입 다물어질 테니까!"
동네 사람들은 그 소리에 깔깔거리고 웃었다. 창문이 덜덜거리고, 가뭄에 바짝 마른 간판들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는 밤이었지만, 국밥집 안은 유난히 따뜻했다.
영옥 할머니는 입은 거칠기가 딱 바다 바람이었지만, 손은 무섭도록 정이 깊었다. 김 약사 뚝배기에는 비계 싫어한다고 살코기만 수북이 얹어주었고, 만식 아저씨 뚝배기에는 순대를 한 대접 덤으로 얹었다.
"근데 할매, 저기 구석에 놓인 저 뚝배기는 누구 거요? 손님도 안 왔는데 왜 벌써 국물을 부어놔?"
만식 아저씨가 주방 선반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자그마한 뚝배기 하나를 가리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위에는 새우젓도, 다대기도 없이 깨끗한 뽀얀 국물만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뚝배기 밑받침을 행주로 쓱 닦으며 무심하게 답했다.
"임자 따로 있다."
"누구? 오늘 같은 날 찾아올 손님이 또 있어?"
"바람이 데려오겠지. 물어보지 말고 네 밥이나 먹어."
만식 아저씨는 "에이, 할매는 맨날 비밀이 많아"라며 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쏟아부었다. 유리창 너머로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들이쳤지만, 사람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작년 태풍 때 누구 집 지붕이 날아갔는지, 누구 집 고추밭이 엎어졌는지를 두고 내기를 걸며 웃었다.
태풍이 올 때마다 이 작은 국밥집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안전한 섬이 되었다.
2막 | 할머니의 이상한 정적
하지만 그 시끄러운 웃음판 속에서도 영옥 할머니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바람이 가장 세게 불어쳐 지붕의 양철판이 '쿵!' 하고 울리는 순간이 오면, 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국자를 들던 손도, 뚝배기를 나르던 발걸음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할매, 왜 그래? 어디 아파?"
동네 사람이 물으면, 할머니는 1초, 2초... 긴 시간을 침묵 속에 보내다가 허리를 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니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에이, 이 바람에 무슨 대문이 닫혀. 바람에 쓰레기통 넘어가는 소리지."
사람들은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귀가 먹었거나 쓸데없이 예민해진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태풍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할머니의 그 '멈춤'은 더 자주 반복되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할머니가 가게 안의 그 작은 뚝배기 국물이 식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새 국물로 토렴을 다시 해서 놓아둔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식으면 비우고, 다시 붓고. 또 식으면 다시 뜨거운 국물을 쏟아 넣었다.
마치 누군가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들어와 "할머니, 저 왔어요" 할 것처럼.
어느 날은 김 약사가 슬쩍 물었다.
"할매, 그 뚝배기... 혹시 서울 간 큰아들 오면 주려고 그러는 거요? 그놈은 연락도 안 끊긴 지가 십 년이 넘었다며."
그러자 할머니는 뚝배기를 나르던 쟁반으로 김 약사의 등짝을 후려쳤다.
"약이나 팔 것이지 남의 집 자식 타령은 왜 해! 주둥이에 밥이나 처넣어!"
사람들은 또 왁자지꺼하게 웃었다. 할머니의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냐며, 자식한테 버림받고도 자존심만 살아있다고 속닥거렸다. 할머니는 그 속닥거림을 다 들으면서도 그저 묵묵히, 식어가는 작은 뚝배기에 뜨거운 사골 국물을 퍼 담을 뿐이었다.
3막 | 계절은 기억을 다듬고 바람은 한숨을 실어 나른다
여름의 끝자락에 찾아오던 태풍이 지나가면 골목은 비로소 깊은 가을로 접어들었다.
국밥집 앞 오래된 은행나무는 노란 잎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낙엽들은 가게 문 앞에 모여 있다가, 손님이 문을 열 때마다 스르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마치 오래된 손님처럼.
할머니의 무릎은 가을 비가 내릴 때마다 더 자주 시려왔다. 할머니는 수건을 뜨거운 방아깨비처럼 꼬아 무릎에 묶은 채 여전히 가을 가뭄을 뚫고 가마솥을 피웠다.
겨울이 오면 바람의 소리가 달라졌다.
여름 태풍의 바람이 '쿵쿵'거리는 거친 사내의 발소리 같았다면, 겨울 칼바람은 누군가 문틈으로 가늘게 신음하는 소리 같았다.
"할매, 올해는 눈이 많이 온대. 무릎도 안 좋은데 겨울에는 좀 쉬지 그래?"
세탁소 만식 아저씨가 내복을 한 겹 더 껴입고 들어와 난로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쉬긴 뭘 쉬어. 사람이 안 쉬어야 살아있는 거지. 누워있으면 그게 시체지 사람이냐."
"말이나 못 하면... 그런데 할매, 가끔 생각해보면 이상해."
" 뭐가 또 이상해?"
"이 집은 왜 여름 태풍 때나 겨울 폭설 때만 이상하게 손님이 더 많을까? 쨍쨍한 날에는 파리만 날리면서."
할머니는 난로 위에 올려둔 찌그러진 놋주전자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이 햇살 좋을 때는 제 발로 잘 걸어 다니느라 남의 온기를 안 찾아. 근데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 눈앞이 깜깜해지면... 그때서야 사람이 사람을 찾아오는 거여. 태풍이 불어야 비로소 자기가 혼자인 걸 알거든."
할머니는 놋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흰 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마솥의 김은 늘 위로 올라갔지만, 할머니의 한숨은 늘 바닥으로 낮게 깔렸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조금씩 더 둔해졌다. 뚝배기를 나르는 손이 떨려 국물이 받침대에 조금씩 넘치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늙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그 깊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세월이 그러하듯, 나이가 들면 사람이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는 법이라고만 생각했다.
4막 | 멈춰버린 시계와 작은 균열
그해 겨울의 끝자락, 또 한 번의 기이한 폭풍우가 찾아왔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봄을 질투하는 찬 비와 거센 바람이 온 동네를 들이쳤다.
라디오에서는 연신 재난 경보가 울렸다.
"이번 비바람은 순간 최대 풍속이..."
동네 사람들은 늘 그렇듯 피난이라도 오듯 <늘봄국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우, 추워! 무슨 날씨가 이래?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 아주 난리가 났네!"
김 약사, 만식 아저씨, 삼거리 댁이 줄줄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주방 안이 조용했다. 늘 들려야 할 "왔냐!", "시끄럽다!" 하는 영옥 할머니의 맵찬 호통 소리가 없었다.
"할매? 어디 갔어?"
만식 아저씨가 주방 안을 빼꼼 내다보았다.
할머니는 가마솥 앞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마솥에서는 물이펄펄 끓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손에는 국자가 들려있지 않았다.
"할매, 왜 그래? 어디 많이 아파?"
김 약사가 놀라 다가갔다. 할머니는 멍한 눈으로 주방 벽에 걸린 낡은 태엽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바늘은 8시 15분에 멈춰 있었다. 건전지가 다 된 지 오래되어 보였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그 시계를 바꾸지 않았다.
"김 약사..."
할머니의 목소리가 비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가늘게 떨렸다.
"어, 어, 할매. 왜 그래? 어디 담이라도 결렸어?"
"바람 소리가... 오늘따라 너무 크다."
"날씨가 안 좋으니까 그렇지. 일로 와서 좀 앉아봐. 내 청심환이라도 하나 가져올까?"
할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늘 선반 구석에 놓아두던 그 자그마한 뚝배기를 가리켰다.
"국물... 식었다. 토렴 다시 해야 되는데... 내 몸이 안 움직인다..."
"아이구, 이 할매가 정말! 지금 그 뚝배기가 문제야? 할매 얼굴이 흙빛인데!"
삼거리 댁이 달려들어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가마솥 불길 앞에 있으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동네 사람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늘 단단한 바위 같던 영옥 할머니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이 국밥집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었다.
"119 불러! 김 약사, 빨리!"
가게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람 소리와 빗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들어갔다.
그러나 그 소란 속에서도 영옥 할머니의 시선은 오직 하나, 문가 쪽과 식어버린 작은 뚝배기만을 향해 있었다.
5막 | 바람이 들려준 이름
병원으로 실려 간 할머니는 다음 날 새벽,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쓸쓸했다. 연락이 닿는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세탁소 만식 아저씨와 김 약사,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상주를 자처하며 상가를 지켰다.
"참 허망하네... 평생 국밥만 말아 파시더니, 갈 때는 이렇게 훌쩍 가버리시나."
김 약사가 술잔을 비우며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만식이 자네, 할매 집 정리하다가 뭐 나온 거 없나? 자식 연락처라도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만식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놋쇠 열쇠고리와 때묻은 빛바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국밥집 방 안 장롱 깊은 곳에 이게 있더라고... 다 타버린 신문 조각이랑 서류 몇 장이야."
사람들이 만식 아저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만식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서류를 펼쳤다. 그것은 40년 전, 1980년대 초반의 빛바랜 신문 스크랩이었다.
[헤드라인: 동해안 폭풍우로 오징어잡이 어선 침몰... 선원 3명 실종]
신문 기사 하단에는 작은 사진과 함께 실종자 명단이 적혀 있었다.
'선원: 강민우 (당시 7세)'
"7살? 선원에 7살짜리가 왜 있어?"
김 약사가 눈을 거늘게 뜨고 기사를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당시 풍랑주의보가 발효된 가운데,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어선에 선장의 어린 아들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배에 탔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에 파도에 쓸려갔으며... 당시 현장에는 소년의 어머니 이영옥(당시 34세) 씨가 바닷가에서 오열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의 숨소리가 순간 멈췄다.
"이영옥... 할매 이름이잖아..."
만식 아저씨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 안에는 신문 스크랩 외에도 빛바랜 육아 수첩 하나가 더 들어있었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흘려 쓴 할머니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민우야. 태풍이 오면 바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네가 엄마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린다. 그래서 엄마는 문을 열어둔다. 뜨거운 국물을 끓여놓고 기다린다. 네가 배고파서 돌아올 때, 국물이 식어있으면 안 되니까. 가마솥 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비바람이 세게 불면 네가 길을 잃을까 봐, 엄마는 가게 문을 제일 크게 열어둔다.'
"아..."
김 약사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동네 사람들은 모든 장면의 의미를 깨달았다.
왜 영옥 할머니가 남들은 다 문을 닫는 태풍 날에만 가게 문을 열었는지.
왜 거센 바람이 불어 지붕이 쿵쿵 울릴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는지.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난 것 같다"며 왜 그렇게 문가를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앉지 않는 주방 선반 구석에, 새우젓도 다대기도 넣지 않은 뽀얀 뚝배기 하나를 끊임없이 토렴하며 뜨겁게 데워두었는지.
할머니는 40년 동안, 태풍이 불 때마다 바다에 빼앗긴 일곱 살짜리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온통 비바람으로 어둡고 시끄러울 때, 혹시라도 제 집을 찾아 돌아올 어린 자식이 배를 골릴까 봐. 문이 닫혀있어 그냥 돌아갈까 봐.
그 무서운 태풍의 밤마다, 동네 사람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웃고 잡담을 나누던 그 국밥집은... 한 어머니가 40년 동안 꺼뜨리지 않은 슬프고도 가장 뜨거운 등대였다.
장례식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만이 흘렀다. 만식 아저씨도, 김 약사도, 삼거리 댁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창밖에 내리는 겨울비 소리만을 덧없이 듣고 있었다.
에필로그 |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햇살이 앉는다
봄이 찾아왔다.
태풍과 폭설에 비틀거리던 골목 어귀의 오래된 건물들은 하나둘씩 리모델링을 시작했고, <늘봄국밥>이 있던 자리도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오래된 가마솥은 철거되었고, 때묻은 셔터도 새로 칠해졌다.
어느 따뜻한 오후, 만식 아저씨와 김 약사는 새로 들어선 작은 카페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어깨를 내리쬐고 있었다.
"김 약사."
"응?"
"오늘 날씨 참 좋다."
"그러게 말이다. 비 한 방울 안 오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문득 골목 저편에서 기분 좋은 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 끝에 어디선가 흩날려 온 노란 민들레 홀씨 하나가 새로 칠해진 가게 문 앞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김 약사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민들레 홀씨를 바라보았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되겠다."
김 약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
"이제는 바람이 불어도, 그 집 가마솥 불 안 꺼뜨려도 되잖아. 할매, 이제 아들 만났을 테니까."
만식 아저씨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뚝배기에 국물이 토렴 되는 탕, 탕 소리가 아주 멀리서, 환청처럼 기분 좋게 들려오는 듯했다. 봄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바람은 그저 골목길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오래된 사람들의 기억 위로 따뜻한 온기만을 곱게 퍼뜨리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서 거대한 태풍을 만납니다.
그 태풍은 누군가에게는 이별이고, 누군가에게는 실패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아픈 비바람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딘가에 나를 위해 불을 지피고, 식지 않은 뜨거운 국물 한 사발을 준비해 둔 채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 비바람이 불고 있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태풍은 모든 것을 쓸어가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온기를 찾아 나서게 하기 위해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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