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간에는 요괴가 산다






🌸 밤이면 외할머니의 헛간은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우리 외할머니 댁 헛간에는 여름마다 요괴가 하나 살고 있었다.

그 요괴는 키가 칠 척이 넘고, 밤이 깊어지면 삐걱삐걱 대들보를 타고 내려와 어린아이의 창자를 빼먹는다고 했다. 아홉 살이던 그해 여름, 방학을 맞아 지리산 자락의 나주 외가로 내려온 나는 그 헛간 앞을 지날 때마다 오줌을 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외할머니 댁은 대문도 없는 흙집이었다. 담장 대신 마당가를 둘러싼 건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옥수수밭이었고, 그 옥수수밭 끝자락, 밤나무 그늘이 어둡게 내린 자리에 험상굳게 일그러진 흙벽 헛간이 있었다. 그 헛간 문 고리에는 녹슨 쇠사슬이 꽁꽁 묶여 있었고, 외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저 안에는 무서운 게 들어 있응께, 얼씬도 마라. 열쇠를 건드리기만 해도 요괴가 나와서 네놈 허파를 후벼 파먹을 거야."



😊 고추장에 밥 비벼 먹는 요괴는 없다

"할매, 요괴는 사람이 먹는 밥도 먹어?"
"아따, 이놈이 또 헛소리를 해쌓네! 요괴는 사람 간빼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 했다!"

마루에 앉아 땡볕을 받으며 고추장을 쓱쓱 비벼 드시던 할머니가 열무김치를 이빨도 없는 잇몸으로 우물거리며 소리를 지르셨다. 할머니는 칠순이 넘으셨는데도 목청이 어찌나 크신지, 안마당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마당가 닭들이 깜짝 놀라 꼬꼬댁거리며 튈 정도였다.

옆집 동네 반장인 만식 아재가 담장 너머로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어르신! 또 손주놈하고 싸우십니까? 마당이 울려서 이장이 방송하는 줄 알았당께요."
"말도 마라, 만식아. 이놈의 가시나 자식이 헛간 문을 자꾸 두리번거려서 내가 심장이 졸여서 못 살겠다. 저 안에서 요괴가 삐져나오면 너희 집 돼지부터 씹어먹을 줄 알아라!"
"에이, 어르신도. 요즘 시대에 뭔 요괴요? 그 안에 묵은 된장 독이나 들어 있겠지."

만식 아재가 껄껄 웃으며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만식 아재가 웃으면서도 헛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는 것을. 동네 어른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정자나무 아래서도 헛간 이야기만 나오면 어르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담배꽁초를 침 뱉듯 내던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곤 했다.

"어허, 밤바람 차다. 들어가자."

땡볕이 내려쬐는 한낮에도 어르신들은 헛간 소리만 나오면 밤바람 타령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수상한 건 우리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매일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면, 마당 한쪽에 놓인 가마솥에서 하얀 쌀밥을 퍼 담으셨다. 보리밥만 드시는 할머니가 손주인 나에게도 잘 안 주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을 놋그릇에 수북하게 고깔 모양으로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거기에 주먹만 한 자반고등어 토막이나 달걀부침을 슬그머니 올려놓으셨다.

"할매, 내 밥이야?"
"네 이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 하얀 쌀밥을 탐내? 이건… 저기… 요괴 달래는 밥이다!"
"요괴한테 밥을 줘?"
"아따, 이놈아! 요괴도 배가 부르면 사람을 안 잡아먹을 거 아니냐! 성가시게 굴지 말고 어서 네 보리밥이나 처먹어라!"

할머니는 놋그릇을 쟁반에 바쳐 들고는, 꼭 나를 방에 가둬놓고 문을 고리로 잠근 뒤에야 헛간 쪽으로 가셨다.

방문 창살에 뚫린 조그만 구멍으로 내다보면,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헛간 문틈으로 그 놋그릇을 밀어 넣곤 하셨다. 그러면 헛간 안에서 '덜컹, 덜컹' 하고 쇠사슬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이내 '우걱우걱' 하고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씹어먹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요괴가 밥을 먹는 소리였다.



🌿 밥그릇은 항상 비어 있었다

매일 밤 9시가 되면, 헛간에서는 어김없이 기괴한 소리가 시작되었다.

삐-걱, 삐-걱.

나무 대들보가 비틀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거운 철퇴를 바닥에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묵주 알을 굴리거나, 때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셨다.

"저놈의 요괴가 또 밤마실을 나가려고 저란다. 천둥이 쳐서 확 대가리를 맞아야 할 터인데."

할머니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셨지만, 그 표정은 무섭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기진맥진해 보였다.

하루는 할머니가 밭에 고추를 따러 가신 사이에,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헛간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한여름 낮의 열기 속에서도 헛간 근처로 가자 이상하게 서늘한 한기가 뼈마디를 찔렀다.

헛간문 하단에는 할머니가 밥그릇을 넣었다 뺐다 하는 조그만 개구멍 같은 틈이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쪼그려 앉아 그 문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코 끝을 파고드는 냄새가 있었다.

곰팡이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매일 할머니가 비벼 넣던 풋고추와 된장 냄새, 희미한 자반고등어 비린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요괴의 이빨도, 무서운 눈알도 아니었다.
말끔하게 비워진 놋그릇이었다.

싹싹 긁어먹어서 밥풀 하나 남아있지 않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놋그릇.

'요괴가 고등어 가시까지 다 씹어먹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괴라면 사람 피를 빨아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왜 할머니가 끓여준 시래깃국과 자반고등어 가시까지 깔끔하게 비우는 걸까?

내가 헛간 문틈에 눈을 대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헉- 헉- 하는, 폐병 환자처럼 가쁘고 기침이 섞인 숨소리. 그리고 이내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순… 영이냐?"

순영은 우리 외할머니의 이름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요괴가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으아악! 요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밭으로 도망쳤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달렸다. 밭에서 고추를 따던 할머니가 달려와 나를 다독였다.

"왜 그냐, 무슨 일이냐!"
"할매! 요괴가… 요괴가 할매 이름을 불렀어! 할매를 잡아먹으려고 그래!"

할머니의 손이 순간 딱 정지했다. 고추를 담던 바구니를 쥔 할머니의 마디진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할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할머니의 굵은 주름 사이로 한여름의 뼛속까지 시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착각이다. 요괴가 사람 말을 할 리가 있냐."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셨다. 그날 밤, 할머니는 평소보다 더 많은 흰 쌀밥을 퍼 담으셨고, 자반고등어도 두 토막이나 구우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 옥수수가 시들어갈 때

여름이 깊어질수록 헛간의 요괴는 점점 더 자주 울부짖었다.

어떤 날 밤에는 쇠사슬을 마구 흔들며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고, 어떤 날 밤에는 아기처럼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할머니는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잠에서 깨어 마루로 나아가 앉으셨다.

마루 끝에 앉아 헛간 쪽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마치 오래된 석상 같았다.

"할매, 안 자?"
"먼저 자라. 요괴가 밤바람을 타서 성질이 났는가 보다. 내가 감시를 해야지."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 이장 아저씨한테 잡아달라고 하자."
"쯧쯧, 미련한 놈. 세상 경찰이 요괴를 어떻게 잡냐. 요괴는… 사람 힘으로 못 잡는 거야."

8월 한가위가 가까워져 오자, 그렇게 무섭게 울어대던 옥수수밭이 갈색으로 시들어갔다. 푸르던 옥수수 잎사귀들이 바짝 말라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 서걱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계절이 여름의 한복판에서 가을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그 무렵, 헛간 안의 요괴도 조금씩 변해갔다.

밥 먹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할머니가 넣어주는 놋그릇에는 밥이 반 이상 남아서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쇠사슬을 흔드는 소리도 힘을 잃었다. 삐-걱, 삐-걱 하던 거친 소리는, 이제 건조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비벼지는 것 같은 아주 작고 가녀린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할매, 요괴가 병들었나 봐. 밥을 안 먹어."

내가 남겨진 밥그릇을 보며 말하자, 할머니는 아무 대답 없이 놋그릇을 씻으셨다.
수세미로 놋그릇을 문지르는 할머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퐁퐁 거품 사이로 떨어지는 할머니의 눈물이 놋그릇 위에서 톡, 톡 소리를 내며 깨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요괴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요괴가 사라질까 봐 무서워하고 있었다.



🌧  장장 오십 년 동안 닫혀 있던 문

그해 여름의 끝자락, 태풍이 지리산 자락을 쓸고 지나가던 밤이었다.

거센 비바람이 온 동네를 흔들었고, 옥수수 밭은 모조리 땅 바닥에 누워버렸다. 벼락이 치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창문이 덜덜 떨렸다.

쾅-!

집 뒤편에서 거대한 소리가 났다. 밤나무 가지가 부러져 헛간 지붕을 덮친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겉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마당으로 뛰어나가셨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헛간 문을 바라본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거센 바람과 부러진 나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헛간 문을 묶고 있던 오래된 쇠사슬이 녹슨 고리와 함께 뜯겨 나가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오십 년 동안 닫혀 있었다던 그 무시무시한 헛간 문이, 장대비 속에서 삐걱거리며 반쯤 열려 있었다.

" 안 된다! 보지 마라! 보지 마라 이놈아!"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내 눈을 가리려 하셨다. 하지만 번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으며 환하게 빛을 발한 그 짧은 찰나, 나는 보았다.

헛간 안에는 요괴가 없었다.

칠 척이 넘는 괴물도, 허파를 파먹는 귀신도 없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머리와 수염이 엉덩이까지 길게 자라 텁석부리가 된, 갈비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마른 늙은 남자가 썩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그 남자의 다리 한쪽은 가늘게 비틀려 있었고, 발목에는 무거운 철착이 채워져 있었다.

남자는 번개 불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 영이냐? 비가… 비가 많이 오는구나…"

할머니는 빗속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그리고는 엉엉 울기 시작하셨다. 평소의 그 호통치던 무서운 외할머니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처럼 땅을 치며,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목놓아 울부짖으셨다.

"이 미련한 영감탱이야! 와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냐! 와 나를 이렇게 괴롭히냐! 차라리 죽어버리지, 와 아직도 이러고 있냐!"



요괴라는 이름의 사내

다음 날 아침, 태풍이 물러가고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외할머니 댁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이장 아재도, 만식 아재도, 정자나무 아래서 담배를 피우던 동네 어르신들도 모두 모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놀라거나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헛간 안으로 들어가, 썩은 짚더미 위에서 숨을 거친 남자를 가마니에 올려 천천히 밖으로 짊어지고 나왔다.

만식 아재가 눈물을 닦으며 외할머니에게 다가왔다.

"어르신… 큰어르신께서 마침내 편해지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멍하니 햇살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제야 나는 동네 어르신들의 나지막한 대화를 통해, 헛간 속 '요괴'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나의 외할아버지였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외할아버지는 인공 치하에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면사무소 서기 일을 맡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뒤집혔을 때, 외할아버지는 '부역자'라는 탈을 쓰고 총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다.

외할머니는 총살장으로 끌려가던 외할아버지를 밤중에 몰래 빼돌려, 집 뒤편 헛간에 숨기셨다.

'며칠만 숨어 있으면 세상이 조용해지겠지.'
'달포만 참으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바뀌겠지.'

그 며칠이, 그 달포가… 오십 년이 되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연좌제의 공포와 세상의 눈총은 오십 년 동안 외할머니의 목을 죄어왔다. 조금이라도 소문이 나면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날까 두려웠던 할머니는,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요괴'로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저 안에 요괴가 산다."
"사람 간을 파먹는 괴물이 들어 있다."

어린 자식들에게도, 손주인 나에게도, 지나가는 이웃들에게도 할머니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거짓말을 하셨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는 오십 년 동안 그 무시무시한 거짓말의 형벌을 혼자서 짊어지고 사셨던 것이다.

동네 어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만식 아재도, 이장님도, 정자나무 아래 어르신들도… 그 헛간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계셨다.
다만 그 시절,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기 위해 모두가 외할머니의 '요괴 이야기'에 속아주는 척을 했던 것이었다.

밤마다 들리던 삐-걱, 삐-걱 소리는 요괴가 대들보를 타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리가 부러진 외할아버지가 좁은 헛간 안에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발목에 찬 철심을 끌며 좁은 바닥을 왔다갔다 걸어 다니던 발자국 소리였다.

할머니가 매일 밤 비벼 넣던 흰 쌀밥과 자반고등어는, 요괴를 달래는 제물이 아니었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살아가는 남편에게 마누라가 줄 수 있는, 가장 슬프고 고귀한 사랑의 밥상이었다.

"…순영이냐?"

외할아버지가 평생 동안 어둠 속에서 외친 그 한마디는, 요괴의 주문이 아니라 오십 년 동안 마누라의 이름밖에 부를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아득한 고백이었다.



🌅 헛간 자리에 핀 민들레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오십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외할아버지는, 집 뒤편 양지 바른 밤나무 언덕에 묻히셨다.

헛간은 허물어졌다.
녹슨 쇠사슬도, 일그러진 흙벽도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따스한 가을 햇살만 가득 내리쬐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아침, 나는 허물어진 헛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끔찍하고 무서웠던 자리,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흙더미 사이에 작은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오래된 놋그릇을 짚풀로 쓱쓱 문질러 닦고 계셨다. 오십 년 동안 외할아버지의 밥상이 되어주었던 그 놋그릇이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 하고 맑은 빛을 내뿜었다.

"할매, 이제 놋그릇 안 닦아도 되잖아."

내가 곁으로 다가가 말하자, 할머니는 손을 멈추고 놋그릇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셨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로, 오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아주 작고 엷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니다. 깨끗이 닦아 놔야지."
"왜?"
"나중에 내가 하늘나라 가서 영감 만나면… 또 여기다 따뜻한 흰 쌀밥 수북하게 퍼 담아 줘야 할 거 아니냐. 그 인간, 평생 어두운 데서 찬밥만 먹어서 불쌍해서 어쩌냐."

바람이 불어왔다.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따스한 가을바람이 헛간 자리의 노란 민들레를 슬그머니 흔들고 지나갔다.

마당 한구석 가마솥에서는, 가을 흰 쌀로 짓는 구수한 밥 냄새가 하얀 연기와 함께 하늘로 지그시 올라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우리가 살아온 세월 속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비밀들이 참 많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이야기였고, 누군가에게는 비웃음거리였을지 모를 일들이,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뼛속까지 시린 사랑이고 생존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기억 속에도,
혹시 너무 무서워서 감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자신만의 '헛간'이 하나쯤 있지 않은지요.

이제는 그 문을 열어도 괜찮습니다.
그 안에는 요괴가 아니라, 당신을 온몸으로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었던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와,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