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유산 위에 피어난 꽃


1. 26년의 손때가 묻은 서랍

빛바랜 목재 책상 서랍을 열자 낡은 장부들이 빼곡히 모습을 드러냈다. 종수가 청춘을 바쳐 일해 온 26년이라는 세월이 그 종이 뭉치들 속에 고스란히 켜켜이 쌓여 있었다. 손때가 타서 모서리가 마모된 장부들을 하나씩 만져보던 종수의 손끝이 무겁게 떨려왔다.

사무실 안은 적막했다. 평소 같으면 전화벨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 손님을 응대하는 목소리로 북적였을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서늘한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김 실장, 조금만 더 고생해. 이번에 추진하는 사업만 대박 터지면 말이야, 자네들 평생 먹고살 집 한 채씩은 내가 꼭 턱 하니 사줄 테니까. 알지? 나 박 원장이야. 내가 말로만 이러는 사람 아니잖아?"

기억 속 박 원장의 목소리는 늘 호탕했고 입에 달린 말은 번지르르했다. 평생의 은인이라도 될 것처럼 직원들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정작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직원들의 삶도, 사업장의 미래도 아니었다.

원장은 사업 자체에는 까막눈이었고 열정조차 없었다. 거래처 관리부터 자금 집행, 잡다한 현장 실무까지 모든 짐을 평균 근속 연수 20년이 넘는 5명의 베테랑 직원들에게 덤터기 씌워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사업가’라 칭하며, 매달 사무실 통장에서 거액의 돈을 수시로 빼내 갔다.

그 돈이 흘러간 곳은 어두컴컴한 도박장이거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박 노름판이었다. 직원들이 밤을 새우며 눈이 짓진 채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 원장은 욕망에 눈이 멀어 수억 원의 회사 자금을 허공에 탕진하고 돌아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월급이 밀려 직원들이 생계를 위협받을 때도, 그는 "곧 큰 돈이 들어오니 참아라"라는 감언이설로 직원들의 발목을 잡았다. 순진한 직원들은 그 말을 믿었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인 정과 의리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했다.

2. 업보와 비정함

하늘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던가. 남의 피땀을 쥐어짜며 제 헛된 욕심만 채우던 박 원장에게 찾아온 것은 비참한 병마였다. 칠순을 겨우 넘긴 나이, 혈액암 시한부 6개월 판정.

하지만 병상에 누워서조차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자신이 진 빚과 탕진한 돈 때문에 고통받는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비가 부족하다며 사무실의 남은 자산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은 죗값을 치르듯, 판정을 받은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처절하게 숨을 거두었다.

"악덕한 인간, 천벌을 받아 그렇게 간 게지."

직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 부장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비극은 원장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족들의 눈빛에는 슬픔 대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원장이 남긴 거액의 채무와 도박 빚을 확인하자마자, 자식들과 친척들은 일절 망설임 없이 법원으로 달려가 ‘상속포기’ 도장을 찍고 돌아서 버렸다.

"아버지 빚인데 저희가 그걸 왜 갚습니까? 퇴직금이요? 저희한테 달라고 하지 마세요. 법적으로 저희랑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유족 대표로 나온 원장의 두딸은 차갑게 일갈하며 돌아섰다. 26년을 바쳐 일한 종수, 23년을 바친 이 부장, 그리고 20년 넘게 일해 온 동료 3명.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세월을 바친 5명 직원들의 퇴직금은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유족의 상속포기로 인해  직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노동의 대가조차 단 한 푼 건지지 못했다. 억울함에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흘렀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늙어버린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텅 빈 통장과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3. 절망 끝에서 잡은 손

"김 실장… 우리 이제 어쩌나?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다시 시작해?"

경리 업무를 보던 정 양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사무실에는 짙은 절망감이 먹구름처럼 내려앉았다. 5명의 직원들은 텅 빈 사무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밤이 깊어지도록 말없이 담배 연기만 피워 올렸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종수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20년 동안 이 사무실 실무는 누가 돌렸습니까? 박 원장이 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종수에게 쏠렸다.

"거래처 뚫은 것도 우리고, 일 처리 한 것도 우리입니다. 박 원장은 돈만 가져갔지, 이 사업의 진짜 알맹이는 전부 우리 5명의 머리와 손 끝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이 판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종수의 눈빛이 밤공기를 가르며 빛났다.

"그 인간은 제 욕심 차리다 천벌을 받아 갔지만, 우리가 왜 그 인간 때문에 인생을 포기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20년 넘게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원장 빚 때문에 퇴직금은 날렸지만, 거래처 사람들은 원장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거래해 왔습니다."

이 부장이 무릎을 쳤다. "김 실장 말이 맞아! 생각해보니 거래처 사장들도 박 원장 인간성 싫어서 나랑 김 실장 보고 계약해 준 거였어!"

"맞습니다. 우리 5명이 합치면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퇴직금 못 받은 셈 치고, 각자 끌어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서 우리 이름으로 된 사업장을 다시 냅시다. 사장 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는 진짜 사업장을 만드는 겁니다!"

절망으로 죽어가던 5명의 눈빛에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다. 억울함과 분노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력한 오기와 투지로 바뀌었다.

4. 우리의 이름으로 올린 간판

다음 날부터 5명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비록 큰 자본금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20년 이상의 숙련된 경험'과 '서로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었다.

각자 알뜰하게 모아둔 비상금과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조그마한 상가 건물 2층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실속 있는 공간이었다.

새 간판을 다는 날, 5명의 직원들은 건물 맞은편 길가에 서서 올라가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간판에는 이전 원장의 허세 가득한 이름 대신, 5명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오성(五星) 엔지니어링]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다섯 개의 별처럼 서로를 밝히며 함께 빛나자는 뜻이었다.

소문을 들은 옛 거래처 사장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아이구, 김 사장! 아니, 이제 김 대표지! 박 원장 생전에 그 양반 때문에 속 많이 썩었잖아. 실무는 전부 자네들이 다 한 거 내 진작에 알고 있었네. 이제 진짜 주인들이 사업 시작했으니, 우리 계약 전부 자네들 회사로 돌려줌세!"

원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던 시절과는 달랐다. 직원들이 직접 발로 뛰고, 진심을 다해 고객을 대하자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박 원장이 도박으로 날려 먹던 그 막대한 수익들이 이제는 온전히 고생한 직원들에게, 아니 이제는 공동 대표가 된 5명 모두에게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5. 다시 시작되는 봄

개업한 지 1년이 지나던 날 저녁, 다섯 사람은 인근 식당에서 조촐한 회식을 가졌다.

손때 묻은 옛 장부 대신, 깨끗하고 투명하게 정산된 새로운 결산 장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밀린 월급도, 떼인 퇴직금도 잊혀질 만큼 회사 매출은 급성장하고 있었고, 정당하게 배분된 이익금은 이전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몇 배에 달했다.

"김 대표, 만약 그때 우리가 억울하다고 울고만 앉아있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이 부장이 술잔을 건네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종수는 잔을 채우며 미소를 지었다.

"악덕 사장은 제 죗값을 치르고 세상을 떠났지만, 끝까지 제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믿었던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아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비로소 진짜 우리 인생을 살게 된 거죠."

"맞습니다! 우리의 평균 근로 20년은 버려진 게 아니었습니다!"

다섯 사람의 술잔이 공중에서 힘차게 부딪치며 챙하는 맑은 소리를 냈다.

사무실 창밖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평생을 남의 욕심을 채워주느라 헌신했던 직원들은, 이제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일구어낸 따뜻하고 든든한 둥지 안에서 비로소 진짜 인생의 첫 페이지를 환하게 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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